와카마쓰 쓰토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와카마쓰 쓰토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홋카이도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를 거쳐 1970년 야쿠르트 아톰즈에 입단하여 1989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통산 타율 0.319로 일본인 선수 중 역대 1위 기록을 세웠으며, 수위 타자 2회, MVP 1회, 베스트 나인 9회, 골든 글러브 2회를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1년에는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009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 프로 야구 타격왕 -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히데키는 일본과 미국 프로 야구에서 외야수 및 지명타자로 활약하며 NPB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센트럴 리그 MVP를 3회 수상하고 MLB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친 전직 프로 야구 선수이다. - 일본 프로 야구 타격왕 - 일본 프로 야구 수위 타자
일본 프로 야구 수위 타자는 시즌 최고 타율 선수에게 주어지는 타이틀로, 과거 '타격왕'으로 불렸으나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양대 리그에서 각 리그별 수상자를 배출하고, 이치로와 장훈이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홋카이도 출신 야구 선수 - 이가라시 료타
이가라시 료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며 핵심 불펜 투수로 명성을 얻었고,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 홋카이도 출신 야구 선수 - 이토 히로미
이토 히로미는 2021년부터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활동하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며, 2020년 도쿄 올림픽 금메달, 202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에 기여하고, 2024년에는 최다승과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월간 MVP를 수상했다. - 야쿠르트 아톰스 선수 - 다카쿠라 데루유키
다카쿠라 데루유키는 니시테쓰 라이온스 전성기를 이끈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뛰어난 타격과 수비로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소년 야구 지도자와 니시테쓰 라이온즈 OB 회장으로 활동했다. - 야쿠르트 아톰스 선수 - 도조 후미히로
도조 후미히로는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주로 2루수와 유격수로 활약, 1970년에는 도루왕을 차지한 선수이다.
와카마쓰 쓰토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일본어 이름 | 若松 勉 (わかまつ つとむ) |
출생일 | 1947년 4월 17일 |
출생지 | 홋카이도 루모이시 |
사망일 | 해당사항 없음 |
신장 | 168cm |
체중 | 76kg |
포지션 | 외야수 / 감독 |
투구/타석 | 우투/좌타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년도 | 1970년 |
드래프트 순위 | 3순위 |
소속 구단 | 덴덴홋카이도 야쿠르트 아톰스/야쿠르트 스왈로스 (1971년 ~ 1989년) |
첫 출장 | 1971년 4월 11일 |
마지막 경기 | 1989년 10월 17일 (공식전) / 1990년 3월 22일 (은퇴 경기) |
등번호 | 1 |
코치/감독 경력 | |
소속 구단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86년 ~ 1989년, 1993년 ~ 2005년) |
타격 성적 | |
타율 | 0.319 |
홈런 | 220 |
안타 | 2,173 |
타점 | 884 |
수상 경력 | |
센트럴 리그 MVP | 1978년 |
수위 타자 | 2회 (1972년, 1977년) |
베스트 나인 | 9회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0년, 1984년) |
골든 글러브 | 2회 (1977년, 1978년) |
일본 시리즈 MVP | 1978년 |
올스타 선정 | 11회 (1972년 ~ 1980년, 1983년, 1984년) |
올스타 게임 MVP | 2회 (1973년, 1977년) |
NPB 기록 | 일본 기록 0.319 타율 |
명예의 전당 | |
헌액 | 2009년 |
헌액 자격 | 경기자 표창 |
2. 선수 경력
홋카이도 루모이시에서 태어나 홋카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덴덴홋카이도를 거쳐, 197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야쿠르트 아톰스에 입단했다. 공식 기록상 168cm(자칭 166cm)의 작은 체구 때문에 입단 당시에는 프로 선수로서 자신감이 없었다. 부인에게 "안되면 홋카이도에 돌아가 둘이서 닭꼬치 가게라도 차리자"라고 말하며 입단을 결심했다고 한다.[13][14]
입단 후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프로 1년 차에 주전 좌익수를 차지했고, 프로 2년 차인 1972년에는 3할 2푼 9리의 시즌 최고 타율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6년 7월 9일에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1977년에는 중견수로 변경되어 시즌 최다 안타(158개)와 3할 5푼 8리의 타율로 통산 두 번째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1978년 5월 6일에는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고, 같은 해 팀의 센트럴 리그 첫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센트럴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77년과 1978년 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상(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9년 2062경기 출장, 2173안타, 220홈런, 884타점, 통산 타율 3할 1푼 9리를 기록하며 은퇴했다. 야쿠르트에서만 19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고 42세까지 현역으로 뛰었으며, 현역 선수를 제외한 통산 타율 부문에서 일본인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2. 1. 프로 입단 전
홋카이도루모이시에서 국철 직원이었던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다케시로는 사회인 야구 강호 하코다테 오션의 전 선수였고, 아마추어 심판 자격도 가지고 있었으며, 국철에서도 연식 야구팀에 소속되어 있었다[4]。야구 외에도 노르딕 스키로 국체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5]。와카마쓰는 어릴 때부터 야구와 스키를 접했으며, 루모이 중학교에서는 여름에는 야구부, 겨울에는 스키부에 소속되었고, 육상부 지원군으로 중거리 달리기(800m)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기도 했다. 와카마쓰는 중학교 시절 노르딕 스키와 중거리 달리기를 통해 하반신이 단련되었다고 말했다[6]。호쿠카이 고등학교 입학 당시 스키부와 야구부 중 어느 쪽에 들어갈지 고민했지만, 야구부의 맹훈련을 보고 입부를 결심했다[7][8]。2학년 때부터 2루수로 주전 선수가 되었고, 여름 고시엔에 진출했지만[9], 기관지염으로 인해 결장해야 했다[10]。다음 해 여름 고시엔에는 등번호 14번을 달고 3번 타자, 우익수로 출전, 1회전에서 사가 상업에 패배했지만 이 경기에서 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빠른 발이 주목받았다。
졸업 후에는 덴덴 홋카이도에 진출했다. 홋카이도 택식 은행, 다이쇼와 제지 홋카이도 등 강팀이 많아 팀 자체는 도시 대항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보강 선수로 4년 연속 도시 대항에 출전했다. 1967년 대회에서는 타쿠긴의 보강 선수로 출전, 2회전에서 홈런을 치는 등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준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11]。
공식 신장 168cm(자칭 166cm[12])로, 작은 체구 때문에 프로 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 가을, 다음 시즌부터 야쿠르트 아톰즈를 지휘하게 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사위이자, 헤드 겸 타격 코치인 나카니시 후토시가 와카마쓰의 재능을 알아보고 프로 입단을 권유했다. 와카마쓰는 프로 입단을 꺼려 집을 비우고 도망 다녔지만, 스카우트가 7번이나 찾아왔고, 마지막에는 나카니시 코치도 동행하여 "몸이 작아도 할 수 있다"며 불안해하던 아버지와 부인을 설득했다[13]。결국 와카마쓰는 부인에게 "3년만 시간을 달라. 3년 해보고 안 되면 홋카이도로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프로 입단을 결심했다[14]。
2. 2. 야쿠르트 아톰스·스왈로스 (1971년 ~ 1989년)
1971년 좌익수로 주전 자리를 굳혔다. 112경기에 출전,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305타석) 타율 .303을 기록했다(같은 해 센트럴 리그에서 3할 타자는 나가시마 시게오뿐이었다). 시즌 후에는 등번호를 "'''1'''"로 변경했다.[15][16]1972년에는 타율 .329, 리그 2위인 20도루를 기록하며 수위 타자를 차지, 리그를 대표하는 외야수가 되었다.
1973년에도 리그 2위인 타율 .313을 기록했다. 1972년과 1973년, 2년 연속으로 리그에서 3할 타자가 2명뿐이었는데, 두 해 모두 3할을 기록한 것은 와카마쓰뿐이었다.
1974년에는 전 경기에 출전, 리그 5위인 타율 .312로 3년 연속 3할을 기록했다.
1975년에는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외야 수비에서는 개인 최다인 11개의 보살을 기록했다.
1976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 다니자와 겐이치와 치열하게 수위 타자 경쟁을 벌였고, 막판에 부진했지만 리그 3위인 .344의 타율을 기록했다. 와카마쓰는 수위 타자를 놓친 아쉬움에 연습량을 더욱 늘렸다고 한다.
1977년부터 중견수로 수비 위치를 변경, 같은 해 타율 .358, 20홈런이라는 개인 최고 성적으로 두 번째 수위 타자를 차지하며 야쿠르트의 2위 약진을 이끌었다. 503타석에서 삼진은 단 14개였다.
1978년에는 오스기 가쓰오, 찰리 매뉴엘과 함께 중심 타선을 구성했다. 개막 당시에는 요통과 건초염에 시달려 5월 초 시점에서는 타율 .228로 부진했지만, 5월 6일 다이요전에서 3이닝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최종적으로 미즈타니 사네오와 수위 타자 경쟁을 벌여 리그 2위인 타율 .341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고, 팀은 개막부터 129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첫 우승을 달성했다. 와카마쓰는 센트럴 리그MVP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한큐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7타수 9안타 3타점을 기록했다. 5차전에서는 8회 초에 야마다 히사시에게서 홈런을 쳐 승리에 기여했고,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야쿠르트가 승리하며 팀은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79년에 존 스콧이 입단하면서 중견수에서 다시 좌익수로 돌아갔다.
1980년에는 리그 2위인 타율 .351을 기록했다.
1983년에도 마유미 아키노부(한신 타이거스)에 이어 리그 2위인 타율 .337을 기록했다. [17]
1985년 10월 9일 한신전에서 5회 초에 리처드 게일에게서 우전 안타를 쳐 사상 21번째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원이 되었다.
1986년부터 타격 코치 보좌를 겸임했고(1989년에는 코치로 승격), 쓰치하시 마사유키 감독에게 구리야마 히데키를 스위치 타자로 전향하도록 건의하여 구리야마에게 타격 지도를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구리야마는 이 해 규정 타석 미만(258타석)이었지만 타율 .301을 기록하며 우익수 주전 자리를 꿰찼다. [19]
1987년 4월 21일 주니치전에서 수비 도중 마크 브로하드와 충돌하여 미골이 골절되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지병인 요통이 악화되어 수비에 나서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세키네 준조 감독은 와카마쓰를 대타 전문으로 기용했다. 이 해에는 대타 타율 .444(36타수 16안타)를 기록했다. 이후 은퇴까지 3년간 대타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통산 대타 성적은 타율 .349(258타수 90안타) 12홈런 70타점으로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89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했다. 야쿠르트 한 팀에서 19년 동안 42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통산 타율(4000타수 이상) .31918은 역대 3위(2019년 종료 시점) 기록이며, 5000타수 이상 중에서는 역대 1위(2019년 종료 시점)이다. 현역 시절 사용했던 등번호 "1"은 와카마쓰의 은퇴 후 "영구 결번"으로 하자는 서명이 많이 모였고, 이후 등번호 "1"은 이케야마 타카히로, 이와무라 아키노리, 아오키 노리치카, 야마다 테츠토와 같이 팀의 간판 선수로 성장한 선수에게만 착용이 허용되는 번호가 되었다.
2. 3. 은퇴 후
1990년부터 1992년까지 TV 아사히와 닛칸 스포츠 야구 해설위원을 역임했고, 1993년에는 친정팀인 야쿠르트에 복귀하면서 2군 타격 코치를 2년간 활동했다.[32] 1995년부터 1996년에는 야쿠르트 2군 감독, 1997년부터 1998년 야쿠르트 1군 타격 코치, 1999년에는 1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1년 정규 시즌에서 76승 6무 58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에서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를 상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 2005년 야쿠르트 감독직을 사임했고, 2006년부터 후지 TV, 홋카이도 분카 방송, 닛폰 방송, 산케이 스포츠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32]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원이기도 한 와카마쓰는 2009년 1월 13일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같은 해 12월 3일에는 와카마쓰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에는 가토 료조 일본 야구 기구 커미셔너,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가네다 마사이치, 나카니시 후토시, 후루타 아쓰야, 이와무라 아키노리, 이가라시 료타, 아오키 노리치카 등 약 1,100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아오키는 와카마쓰가 현역 시절에 달았던 등번호 1번을 달겠다고 말했다.[32]
2011년에는 야쿠르트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타격 코치를 맡았다.[32]
현역 시절부터 심한 요통에 시달렸다. 야쿠르트 구단의 트레이너였던 다나카 쇼지로에 따르면, 와카마쓰의 근육은 굳고 굵으며, 그 굳음은 강한 순간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한편, 유연성이 부족하여 장시간의 혹사에는 견딜 수 없어 근육에 부상을 입기 쉬운 체질이었다고 한다.[32] 2001년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 헹가래 때, 이시이 가즈히사가 와카마쓰의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기 때문에, 몸무게가 가벼운 와카마쓰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버렸고,[33] 이 헹가래 이후 요통이 더욱 악화되었다.[34] 또한, 현역 은퇴 후 야쿠르트에서 타격 코치·2군 감독을 맡았을 때는, 성실한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로 위를 앓았다.[32]
1군 감독 시절에는 시즌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 해 처음 1군 승격을 한 선수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라고 말을 걸어, 1군 치프 코치인 와타나베 스스무로부터 "좀 더 의연하게 대해야 한다"라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감독 시절에는 자체 전력이 중심이면서 그 틈새를 메우는 형태로 트레이드를 실시했지만, 모두 구단 주도로 이루어졌고 와카마쓰 본인은 감독 퇴임 후에 "저는 아무도 팀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라고 분명히 밝혔다.[35]
와카마쓰는 "저에게 있어서 미하라 씨가 감독의 원형이라면, 감독으로서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히로오카 씨이다"라고 말했으며,[36] 전술 면에서는 히로오카의 야구를 본보기로 삼았다. 한편 "피칭이나 내야 수비에 대해 코치 이상을 가르칠 수도 없다"면서, 히로오카처럼 선수들을 일일이 직접 지도하는 방법은 채택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도는 코치에게 맡기고 그 직역을 침범하지 않는 미하라의 방식을 따랐다. 각 부문별로 책임자가 되는 코치를 두고 일임하는 방침을 채택, 타격에 관해서만 "아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코치를 통해 조언했다.[37] 후루타 아쓰야는 이 와카마츠의 매니지먼트 법을 "감독에게 의사가 없다기보다는, 감독 자신이 그 코치를 임명하는 시점에서 그 코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각 부문의 책임자에게 항상 배려를 잊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을 취했기 때문에, 와카마츠 재임 중에는 팀 내부의 면밀한 연계가 유지되어 코치의 전횡이나 큰 불협화음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선수의 자율성도 중시하여, 와카마츠가 야쿠르트의 감독이었을 때는 베테랑 선수도 연습 메뉴가 자유로웠다. 후루타는 이에 대해, 프로 야구 선수가 자신의 입장을 지키는 것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코멘트를 자서전에 남겼다.[38]
와카마쓰는 순박하고 말주변이 없어서, 와카마쓰와 행동을 함께 하는 일이 많았던 오가와 준지(당시 2군 감독)에 따르면, 이벤트 등에서의 인사가 끝날 때마다 "지금 제대로 했나? 나, 이상한 말 안 했나"라고 질문받았다고 한다.[39]
3. 지도자 경력
와카마쓰 쓰토무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TV 아사히와 닛칸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1993년에는 친정팀인 야쿠르트에 복귀하여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야쿠르트에서 2군 타격 코치, 2군 감독, 1군 타격 코치를 거쳐 1999년 야쿠르트 1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1년에는 팀을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5년 야쿠르트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에는 후지 TV, 홋카이도 분카 방송, 닛폰 방송, 산케이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이를 축하하는 파티에는 가토 료조 일본 야구 기구 커미셔너,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 야구계 인사들과 아오키 노리치카를 포함한 약 1,100명이 참석했다. 2011년에는 야쿠르트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타격 코치를 맡기도 했다.
3. 1. 야쿠르트 스왈로스 코치 (1993년 ~ 1998년)
와카마쓰 쓰토무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타격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다. 현역 시절부터 앓아온 요통과 코치 시절의 성실한 성격으로 인해 스트레스성 위 질환을 겪었다.[32]3. 2.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 (1999년 ~ 2005년)
와카마쓰 쓰토무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으로서 히로오카 다쓰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36] 전술 면에서도 히로오카의 야구를 본보기로 삼았다.[37] 다만,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는 방식은 채택하지 않고, 기술적인 지도는 코치에게 맡기는 미하라 오사무의 방식을 따랐다.[37] 후루타 아쓰야는 이러한 와카마쓰의 방식을 "감독이 코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각 부문의 책임자에게 항상 배려하며 소통했기 때문에 팀 내부의 긴밀한 연계가 유지되었다"라고 평가했다.[38] 또한 선수의 자율성을 중시하여, 베테랑 선수도 연습 메뉴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었다.[38]감독 시절, 트레이드는 구단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와카마쓰는 "팀에서 아무도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라고 밝혔다.[35] 2001년에는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나, 헹가래 때 이시이 가즈히사가 와카마쓰의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바람에 요통이 더욱 악화되었다.[33][34]
감독 재임 기간 동안 A클래스(상위권) 4회, B클래스(하위권) 3회를 기록했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1999년 | 야쿠르트 | 4위 | 135 | 66 | 69 | 0 | .489 | 15 | 141 | .264 | 4.23 | 52세 |
2000년 | 4위 | 136 | 66 | 69 | 1 | .489 | 12 | 137 | .264 | 3.62 | 53세 | |
2001년 | 1위 | 140 | 76 | 58 | 6 | .567 | — | 148 | .274 | 3.41 | 54세 | |
2002년 | 2위 | 140 | 74 | 62 | 4 | .544 | 11 | 142 | .263 | 3.69 | 55세 | |
2003년 | 3위 | 140 | 71 | 66 | 3 | .518 | 15.5 | 159 | .283 | 4.12 | 56세 | |
2004년 | 2위 | 138 | 72 | 64 | 2 | .529 | 7.5 | 181 | .275 | 4.70 | 57세 | |
2005년 | 4위 | 146 | 71 | 73 | 2 | .493 | 17.5 | 128 | .276 | 4.00 | 58세 | |
통산: 7년 | 975 | 496 | 461 | 18 | .518 | A클래스 4회, B클래스 3회 |
4. 수상 및 기록
와카마쓰 쓰토무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겨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선수 시절 주요 기록
4. 1. 개인 수상
- 수위타자: 2회 (1972년, 1977년)
- 최다 안타: 1회 (1977년) [21] ※1994년부터 표창
- 최우수 선수: 1회 (1978년)
- 베스트 나인: 9회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0년, 1984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2회 (1977년, 1978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2009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78년)
- 월간 MVP: 2회 (1977년 9월, 1982년 9월)
- 올스타 게임 MVP: 2회 (1973년 제1전, 1977년 제1전)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2001년) ※ 감독으로서 표창
- 신어·유행어 대상 어록상 (2001년, "팬 여러분 정말로 일본 제일, 축하드립니다")[24]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회 (1978년)
4. 2. 주요 기록
연도 | 기록 종류 | 기록 내용 | 비고 |
---|---|---|---|
1972년 | 수위타자 | 3할 2푼 9리 | 첫 타이틀 |
1973년 | 올스타전 MVP | 1차전 | |
1976년 | 사이클링 안타 | 7월 9일, 역대 29번째 | |
1977년 | 수위타자 | 3할 5푼 8리 | |
최다 안타 | 158개 | 당시 타이틀 아님, 1994년 제정 |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
올스타전 MVP | 1차전 | ||
1977년 | 월간 MVP | 9월 | |
1978년 | MVP |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
1982년 | 월간 MVP | 9월 | |
2001년 | 센트럴 리그 최우수 감독상 | ||
쇼리키 마쓰타로상 | |||
2009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경기자 부문 |
- 베스트 나인: 9회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0년, 1984년)
- 올스타전 출장: 11회 (1972년 ~ 1980년, 1983년, 1984년)
; 첫 기록
- 첫 출장: 1971년 4월 11일, 다이요 웨일스 2차전 (가와사키 구장), 8회 초에 후지와라 마코토의 대타로 출장
- 첫 타석·첫 안타·첫 타점: 상동, 8회 초에 야마시타 리쓰오로부터 적시타
- 첫 선발 출장: 1971년 4월 30일, 다이요 웨일스 5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2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 첫 홈런: 1971년 5월 1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 초에 외키바 요시로로부터 2점 홈런
; 이정표 기록
- 100홈런: 1978년 4월 14일, 주니치 드래곤스 1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 말에 미사와 준으로부터 선제 솔로 ※역대 95번째
- 1000안타: 1978년 6월 2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 초에 기타벳푸 마나부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111번째
- 1000경기 출장: 1979년 5월 12일, 한신 타이거스 6차전 (나가사키 시영 오하시 구장), 3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207번째
- 150홈런: 1981년 4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 (고라쿠엔 구장), 9회 초에 니시모토 세이로부터 우월 솔로 ※역대 60번째
- 1500안타: 1982년 5월 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 말에 니시모토 세이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43번째
- 1500경기 출장: 1983년 8월 14일, 한신 타이거스 16차전 (헤와다이 구장), 3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76번째
- 3002루타: 1983년 10월 3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6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 초에 몬다 토미아키로부터 좌중간 적시 2루타 ※역대 25번째
- 200홈런: 1985년 5월 8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6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6회 초에 세키네 히로시로부터 솔로 ※역대 45번째
- 3000루타: 1985년 8월 27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 말에 사이토 아키오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27번째
- 2000안타: 1985년 10월 9일, 한신 고시엔 구장), 5회 초에 리처드 게일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21번째
- 1000득점: 1986년 9월 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21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 말에 히로사와 가쓰미의 적시타로 생환 ※역대 20번째
- 3502루타: 1986년 9월 19일, 한신 타이거스 21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 말에 나카타 코지로부터 ※역대 17번째
- 2000경기 출장: 1988년 9월 14일, 한신 타이거스 20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 말에 아라이 유키오의 대타·히라타 카오루의 대타로 출장, 쿠도 카즈히코로부터 2점 적시 2루타 ※역대 26번째
; 기타 기록
- 시즌 타율 3할 이상: 12회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0년, 1982년 ~ 1985년) ※역대 3위
- 타격 베스트 텐 진입: 12회 (1972년 ~ 1980년, 1982년 ~ 1984년) ※역대 5위
- 1경기 5안타: 1976년 6월 24일, 주니치 드래곤스 14차전 (나고야 구장)
- 18경기 연속 안타 3회 (1976년 9월 14일 ~ 1976년 10월 10일, 1980년 4월 22일 ~ 1980년 5월 18일, 1984년 7월 17일 ~ 1984년 8월 14일)
- 2경기 연속 4안타 2회 (1972년 5월 14일 ~ 5월 15일, 1982년 9월 2일 ~ 9월 4일)
- 3타석 연속 홈런: 1978년 5월 6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7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5회 초에 네모토 타카시로부터 솔로, 6회 초에 세키모토 미츠히로로부터 2점 홈런, 7회 초에 다나카 요시로로부터 2점 홈런
- 3이닝 연속 홈런: 상동, 역대 5번째[41]
- 통산 타율: .31918 ※역대 2위 (레론 리의 .320에 이은 숫자. 일본인 선수로서는 1위)
- 통산 대타 타율: .349 ※역대 1위 (300회 이상의 선수 중)
- 통산 끝내기 홈런: 8개 ※센트럴 리그 타이기록
- 통산 대타 끝내기 홈런: 3개 ※역대 1위 타이기록
- 2경기 연속 대타 끝내기 홈런 ※역대 2번째
- 1977년 6월 1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10회 말에 와타나베 스스무의 대타로 출장, 이케타니 코지로로부터 솔로
- 1977년 6월 1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 말에 와타나베 스스무의 대타로 출장, 마츠바라 아키오로부터 2점 홈런
- 1경기 11 수비 기회: 1980년 9월 19일, 한신 타이거스 21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외야수로서의 일본 기록
- 올스타전 선두 타자 홈런 (1973년 제3전) ※역대 5번째
5. 에피소드
- 현역 시절 등번호 1번을 영구 결번으로 하자는 서명 운동이 있었는데, 이후 등번호 1번은 이케야마 다카히로, 이와무라 아키노리, 아오키 노리치카 등과 같이 팀을 대표하는 선수에게만 착용이 허용되는 번호가 되었다.[4]
- 아톰즈, 스왈로즈 시절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뛰어난 타격으로 "철완 아톰"으로 불리기도 했고, 타석에 들어설 때면 구장의 전자 오르간 연주자가 아톰의 주제곡을 등장곡으로 연주하였다.[4]
- 2004년 프로 야구 선수회가 주도한 파업 사태 당시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흡수 합병에 반대하며 선수회의 서명 활동에 참가했다.[4]
- 2001년 10월 6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센트럴 리그 우승을 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팬 여러분, 정말로, 저... 축하합니다."라는 소감을 남겼다.[4]
- 1978년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할 당시 야쿠르트 주력 선수들 가운데 야스다 다케시, 마쓰오카 히로무, 오야 아키히코 등은 모두 1947년생 동갑내기였다. 그 중에서도 오야 아키히코는 친구이자 현역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그 외에도 1947년생을 대표하는 프로 선수로는 야자와 겐이치(주니치 드래건스), 호리우치 쓰네오(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지타 다이라, 에모토 다케노리(이상 한신 타이거스), 히라마쓰 마사지(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가도타 히로미쓰(난카이 호크스), 후쿠모토 유타카(한큐 브레이브스), 스즈키 게이시(긴테쓰 버펄로스) 등이 있으며 이들 중에서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투수가 많았다.[4]
- 개인 통산 기록[4]
기록 종류 | 내용 |
---|---|
사이클링 안타 | 1회(1976년 7월 9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29번째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2회(1972년 ~ 1974년, 1976년 ~ 1980년, 1982년 ~ 1985년) ※역대 3위 |
타격 10위권 진입 | 12회(1972년 ~ 1980년, 1982년 ~ 1984년) ※역대 5위 |
1경기 5안타 | 1976년 6월 24일 |
18경기 연속 안타 | 3회(1976년 9월 14일 ~ 1976년 10월 10일, 1980년 4월 22일 ~ 1980년 5월 18일, 1984년 7월 17일 ~ 1984년 8월 14일) |
2경기 연속 4안타 | 2회(1972년 5월 14일 ~ 5월 15일, 1982년 9월 2일 ~ 9월 4일) |
3타석 연속 홈런 | 1978년 5월 6일 |
통산 대타 홈런 | 12개 ※역대 18위 |
통산 끝내기 홈런 | 8개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통산 대타 끝내기 홈런 | 3개 ※역대 1위 |
2경기 연속 대타 끝내기 홈런 | 1977년 6월 12일 ~ 6월 13일 |
1경기 11차례 수비 기회 | 1980년 9월 19일 ※외야수로서의 일본 기록 |
올스타전 출장 | 11회(1972년 ~ 1980년, 1983년, 1984년) |
올스타전 선두 타자 홈런 | 1973년 제3차전 ※역대 5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79년 5월 12일(207번째) |
참조
[1]
웹사이트
1990年代 {{!}}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
https://www.yakult-s[...]
2021-08-25
[2]
웹사이트
球団のあゆみ-1990年代
https://www.yakult-s[...]
2024-05-06
[3]
웹사이트
若松勉、“小さな大打者”の原点。65年夏、1試合4盗塁の離れ業【二宮清純コラム】
https://www2.myjcom.[...]
2023-08-24
[4]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5]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6]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7]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8]
웹사이트
【球界高校人脈】“猛練習”の北海、ヤクルト若松を育てる
https://www.zakzak.c[...]
産業経済新聞社
2011-09-12
[9]
서적
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70年史
朝日新聞社編
[10]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11]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日本野球連盟 毎日新聞社
[12]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13]
서적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40年史 1969-2009ツバメの記憶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4]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15]
웹사이트
若松勉 北海道が生んだ偉大なる大打者
http://sportsnews.bl[...]
2021-08-26
[16]
서적
1990ヤクルトスワローズファンブック
ヤクルト球団
[17]
웹사이트
年度別成績 1983年 セントラル・リーグ
https://npb.jp/bis/y[...]
2024-10-04
[18]
서적
ヤクルトスワローズ球団史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
웹사이트
難病と闘った江戸っ子エース・土橋正幸さん ゆかりの人々からあふれる思い出話
https://www.sankei.c[...]
2013-09-07
[20]
간행물
プロ野球回顧録(6)引退特集 引き際の美学 2017年1月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1]
서적
プロ野球12球団 監督の査定ファイル2011 (別冊宝島) (別冊宝島 1734 カルチャー&スポーツ)
宝島社
[22]
웹사이트
最多勝、トレード、人的補償、戦力外...藤井秀悟が振り返る波乱のプロ野球人生 「もっと古田さんから勉強しておけばよかった」
https://sportiva.shu[...]
2024-01-17
[23]
간행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2009年3月号、激動の平成20年回顧録、回顧interview、若松勉、[元ヤクルト監督]、「あと一歩からすごく長かった監督として初めてのリーグ優勝」
ベース볼매거진
[24]
웹사이트
【10月6日】2001年(平13) 若松勉監督つい言ってしまった「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https://www.sponichi[...]
2009-10-01
[25]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26]
웹사이트
「現代用語の基礎知識」選 ユーキャン新語・流行語大賞
https://www.jiyu.co.[...]
2021-08-26
[27]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28]
서적
日本プロ野球平成の名将―1989-2012 : "平成"を戦い抜いた83人の監督列伝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9]
웹사이트
ラミちゃん引退…NPB復帰かなわず 夢は監督で「日本一」
https://www.sponichi[...]
2014-10-06
[30]
웹사이트
若松勉氏殿堂入り「小さな大打者」に勲章
https://www.nikkansp[...]
2009-01-14
[31]
웹사이트
燕臨時C・若さん、浜中&武内再生させる!
http://www.sanspo.co[...]
産経デジタル
2011-01-22
[32]
간행물
週刊サンケイ
サンケイ出版
1978-10-15
[33]
서적
2002ヤクルトスワローズファンブック
ヤクルト球団
[34]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35]
웹사이트
SEGA「プロ野球チームをつくろう!ONLINE 2」スペシャルインタビュー
http://www.yakyutsuk[...]
2021-08-26
[36]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37]
서적
背番号1の打撃論
[38]
서적
優柔決断のすすめ
PHP新書
2009
[39]
웹사이트
ヤクルト小川監督を襲う代行の利かない“スピーチ地獄”
http://www.zakzak.co[...]
産経デジタル
2010-10-13
[40]
X
大矢さんから新情報が…
https://x.com/wakama[...]
[41]
서적
日本プロ野球記録大鑑
講談社
[42]
간행물
ACC CM年鑑'79
誠文堂新光社
197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